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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커뮤니티] 붉은악마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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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붉은악마란 이름 

 

1994년 월드컵 독일전에서의 홍명보의 벼락같은 중거리슛이 축구를 처음 보았는데 초등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잔상이 남아 있다. 그러고 시간이 흘러 1998년 16회 프랑스 월드컵이 열렸다. 새벽에 열린 경기임에 모두가 잠든 사이 나 혼자 거실에서 축구를 보았다. 프랑스 월드컵은 네덜란드에 5:0으로 발리면서 차범근 감독은 경기 중간에 전격으로 경질되고 죄인 취급까지 받을 정도로 역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후반에 처음 월드컵에 나왔던 이동국의 날카로운 중거리 슛은 전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두 잔상 모두 중거리 슛이 나에게 인상적이었던건가? 사실 이동국에게 반했겠지? 

 

16강에 올라가보지도 않은 대한민국이 조별예선에서 5:0으로 지며 오대영, 오대빵이라는 신조어까지 낳을 정도고 전 국민에게 충격을 준 경기였지만,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98년은 한국 프로축구가 출범한 이후 폭발적인 관중 증가를 기록하였다. 이동국(포항 스틸러스), 고종수(수원 삼성), 안정환(부산 대우)는 K리그의 간판 스타가 되어 K리그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부산 대우 로얄즈는 98년 아주대에서 안정환을 영입하면서 수용인원 24,000명의 부산 구덕 경기장엔 매 경기 3만명 이상의 관중이 몰리며 평균 관중 26,995명에 달할 정도로 안정환의 인기는 축구계의 아이돌 스타였다.  

 

게으른 천재인 고종수와 98년 포항 입단 첫 해 신인왕이 된 라이언킹 이동국, 꽃미남 안정환으로 비롯된 K리그 경기와 스포츠 뉴스를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보고 녹화까지 할 정도로 축구에 빠지면서 대학생이 되면 ‘붉은 악마’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12번째 선수 ‘붉은 악마’ 

 

‘붉은 악마’는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이 4강에 올라가며 해외 언론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1995년 12월 16일 PC통신 하이텔의 ‘축구동호회’ 운영자 10명이 서울의 카페에서 만나 조직적인 응원 단체를 만들기 위해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 클럽’을 발족하며 한국 대표 서포터즈 팀 ‘붉은 악마’의 시초가 되었다. 

 

1997년 9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명 ‘도쿄대첩’에서 일본 파란 유니폼을 입은 국대 서포터즈인 ‘울트라 닛폰’과 대조되는 붉은색 ‘붉은 악마’는 전국적으로 붉은 패션을 유행시킬 정도로 인기를 끌며 새로운 응원문화를 열었다. 

 

2002년 대망의 한일 월드컵이 열렸다. 경기장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붉은 옷을 입고 붉은 악마 뿔을  쓰고 전국민이 붉은 악마가 되어 길거리 응원을 했다. 이 길거리 응원이 그냥 나온게 아니다. 붉은 악마를 이끄는 운영진들이 서울 광화문, 시청에서 40만 명 길거리 응원전을 주도하며 총 7차례의 경기 동안 연인원 2400만명의 붉은 악마가 길거리로 나와 응원을 했다고 한다. 이 당시만 해도 ‘축구 유니폼’ 문화가 자리 잡지 않았었고 ‘붉은 티셔츠’ 수십 만장을 구하기도 어려워 민관이 협력해 붉은 티셔츠를 제작해서 뿌리면서 전국에서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는 문화가 생겨나며 온 나라가 붉은 색으로 물들며 응원만큼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물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진출이란 역사적 기록도 있지만서도…

 

월드컵 음반 제작에 참여한 김덕수 사물놀이패, 신해철, 크아링넛, 노브레인, 안치환 등이 만든 응원가도 제작비만 받고 제작하며 히트를 쳤고, 이 외에도 월드컵 응원을 이끈 자원봉사자들의 노고가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붉은 악마가 된 인연

 

고3이었던 한일 월드컵은 학교에서 TV로 밖에 볼 수 없었고, 부산 경기 티켓을 구하고도 부모님이 못가게 해서 취소하는 바람에 서럽게 운 것도 아직 기억이 난다. 

 

전국민이 붉은 악마이긴 하지만 붉은 악마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붉은 악마 지부에 가입하면 되었다. 붉은 악마는 여러 지부로 나뉘어져 있고, 다음, 네이버 카페 등을 통해서 붉은 악마 지부에 가입할 수 있다. 드뎌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자 마자 ‘강남 붉은 악마’에 가입은 하게 된다만 학교 생활이 너무 재미나서 다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는 못하고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 2008년 동아시아선수권대회가 중국 충칭에서 열렸고, 친한 친구의 남동생이 붉은악마였는데 충칭으로 원정을 온다고 하였다. 한국에서 만난 적도 없는 붉은 악마 친구들을 이때 알게 되며 중국어를 할 줄 아니 이들과 함께 충칭 경기장과 충칭 시내를 붉은 악마 옷을 입고 돌아다니며 관광하는데 도움을 주고 중국인들에게 환대를 받았다. 그때 자주 갔던 한국 삼겹살 집은 붉은 악마가 올려준 매출 때문에 가게를 완전히 리모델링 할 정도로 성공해버렸다.이 당시만 해도 중국 물가가 한국보다 저렴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시절이었기도 하고…충칭 동아시아 대회 경기는 그 당시에도 중국 신문 뿐만 아니라 여전히 한국 신문에도 붉은 악마팀 사진이 올라왔다. 어릴 때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내 모습을 가끔 회상한다.

 

개인적으로 본격적으로 ‘붉은 악마’와 인연을 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실제 내가 활동하게 된 붉은악마 지부는 'UNITED'. 그 이후로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국대 경기가 있을 때마다 상암 경기장에 가고, 영동대로, 시청 길거리 응원전에 늘 참가하며 붉은악마로 활동하게 된다. 운영진이 아니기 때문에 경기장에 가는 정도이지만 운영진으로 활동하는 이들을 근거리에서 늘 지켜보며 경기가 있기 전에 그들이 준비하는 수고스러움에 늘 존경을 표하면서 경기장엘 간다. 

 

국대 경기를 보면서 내가 하이라이트가 되었던 순간은 ‘2012년 런던 올릭픽’에서 열린 한일 동메달 결정전이었고, 붉은 악마들은 시청광장으로 다들 모여들었다. 그날 검정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놀다가 경기 보러 시청에 가서 부터는 당연히 국대 붉은 유니폼을 입고 있고 응원을 하다가 점점 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신고 있던 하이힐도 뛰는데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신발을 먼저 벗고 맨발로 뛰었다. 그러다 너무 더워서 유니폼까지 벗어버렸다. 붉은 옷으로 뒤덮힌 곳에서 나 혼자 검정 원피스에 맨발이니 그 당시 취재하던 기자들의 눈에 안 띌수가 없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한 취재원은 마이크를 나에게 들이대면서 “왜 맨발로 뛰십니까?” 하길래 

 

“일본이랑 경기할 때 맨발로도 이길 수 있다!”고 애드립 쳤다. ㅎㅎ

 

그 영상은 어디서 돌아다니는지 본 적이 없지만 ㅎㅎㅎ

 

이 외에도 KBS 9시 뉴스부터 친구들이 나를 보았다는 연락이 오기 시작하고,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취재사진 제목으로 인터넷에 맨발의 열정적인 내 모습이 온라인에 박제되어 있다.

 

이렇게, 축구에 진심이었던, 물론 현실상 국대 경기에만 진심이었다. 해외 축구까지 보게 되면 시간을 너무 뺏길 거 같아서 애초에 보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축구 자체는 너무 섹시한 운동이라 한골 한골 넣을 때마다 짜릿함을 느낀다. 

 

대대 손손 이어지는 붉은 악마 

 

붉은 악마 커뮤니티로 얘기가 다시 돌아오자면, 

 

PC 통신에서 시작한 붉은악마라는 커뮤니티는 다음/네이버 카페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고, 회원 가입비 등 없이 누구나 붉은악마가 될 수 있다는 장점 아래 축구에 관심이 있고 대한민국을 응원하고자 하면 언제든 열려 있는 곳이다. 각자 살고 있는 도시의 붉은 악마 지부에 가입하면 된다. 

 

붉은 악마 지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운영진이 될 수 있는데 경기가 열리기 전에 경기장에 미리 가서 카드 섹션을 세팅하기 위해 의자마다 색깔이 다른 종이를 배치하며 “꿈★은 이어진다”, “우리 다시 함께”, ‘AGAIN 2022” 등의 문구를 경기할 때 모든 관중이 흔들어 하나가 되고, 애국가가 울리면 대한민국 태극기가 동시에 같이 올라가며 응원을 시작한다. 

 

길거리 응원 뿐만 아니라 해외 원정을 갈 때도 붉은 악마 소속으로 신청을 하게 되면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출국하여 즐길 수도 있다. 진심으로 해외 원정을 늘 가는 붉은 악마 친구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열정에 감탄하게 된다. 그냥 놀러가는게 아니라 응원장비들을 모두 준비해서 떠난다. 또 다들 사비로 간다!

 

붉은 악마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면서도 거의 30년의 역사가 되고 있는 커뮤니티이다. 이 거대한 커뮤니티가 지속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선 많은 이들이 수고스러움과 애정이 있어야 하고, 2002년에 초등학생이었던 붉은악마의 자녀들이 부모님 따라 응원을 왔다가 대학생이 되어 붉은 악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고등학생이었던 붉은 악마들은 현재는 운영진이 되어서 응원을 리딩한다. 붉은 악마는 남녀 노소, 나이 여부를 떠나서 대대로 이어져가는 일종의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문화가 되어 가며 여전히 살아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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